날씨가 제법 따뜻해지고 공기 또한 청량감이 드는 시원한 날이었기에 산책 가기를 단행했다.
무릎에 까지 내려오는 검정 잠바를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우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온통 시커먼 모습 때문에 까마귀 처럼 보였다.
올록볼록 튀어오른 잠바 때문에 살찐 까마귀 처럼 보였다.
괜찮아. 잠바 때문에 그래. 내 살 아니야.
자주가는 산책로 입구에 어르신들이 장기두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하의 날씨에도 햇빛이 비추는 그 공간은 햇빛 때문만이 아니라 두분의 승부욕 때문에라도 그곳 공기가 후끈거렸다. 평소라면 별 생각없이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왜인지 장기두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다. 쭈뼛거리며 게걸음 같은 걸음으로 그곳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초를 잡은 어르신의 표정이 심각했다. 대충 훑어 보니 두어수 안에 승부가 날 것 같았다. 반면 한을 잡은 어르신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분은 승부가 자기에게 기울었음을 인지하자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젊은 사람이(그분 입장에서) 자신이 승리를 거머쥐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내심 자랑스러웠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환하게 웃었다.
‘내가 이기는거 봤냐?’
여기서 나도 짧은 미소로 화답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르신이 승리하는게 싫었던지 무표정으로 응답하고는 넌지시 장기판 구석에 놀고 있는 초의 상을 보며 눈짓했다. 한을 잡은 어르신이 내 눈을 따라 그대로 장기판으로 옮겨져 갔다. 자신의 차가 상 길에 있었다. 크게 놀란 어르신이 내심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불편한 모습을 표정으로 그대로 내보이셨다.
고개를 장기판에 묻다 시피한 초를 잡은 그 어르신은 연신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급기야는 그 상 길을 보지 못하고 돌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에잉. 내가 졌네 그려.”
하지만 한을 잡은 그 어르신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기뻐하지 않았다. 표정이 심상찮은게 빨리 자리를 피하는게 나을 것 같아 몸을 돌려 가려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젊은이. 어때? 나랑 한판 두는게?”
빠르게 머리가 돌아간다. 아까 잘난체 해 놓은게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지게 되면 개망신이다. 더군다나 이 산책길은 내가 자주 다니는 길이라 왔다 갔다 할때마다 저분이랑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 언제까지고 패배감이 젖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안하는게 이득이…
그 할아버지와 눈 마주쳤다.
한을 잡은 그 어르신은 이런 표현이 미안하지만… 나를 보며 썩소를 날리고 있었다. x밥 새퀴야. 자신있으면 들어오고 아니면 꺼져. 하는 말을 얼굴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안하는게 이득이란 생각이 쏙 들어갔다. 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오늘 집에 들어가 치킨을 시켜 먹을 때도, 랭겜을 돌릴 때도, 자기 전에도,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도 생각 날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도발에 도망친 것을.
그늘에 있던 까마귀 같은 몸을 옮겨 햇살 비추는 그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초를 잡은 어르신이 자리를 비켜주고 자연스레 심판 겸 관중으로 역할을 찾아 갔다. 오랜만에 장기두는 거라 제법 긴장되었다. 나를 상대하는 할아버지가 선심 쓴다는 듯이 한을 가져갔다. 그리고 또다시 썩소를 날렸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썩소 뒤의 숨겨진 패배의 두려움을.
승부가 나에게 기울었다. 할아버지는 쉽사리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리만 달달 떨어댔다. 내 친구였다면 ‘거 장기두는 사람 소풍갔나?’ 라는 드립을 칠 만큼 많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심판 및 관객으로 포지션 변경한 그 할아버지가 참다 못해
“졌구만 그래.”
라고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해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갔고 장기판의 승부 또한 식어버려서 인지 추위가 엄습했다. 할아버지는 이내 포기하셨는지 기물을 다시 잡고 빠르게 다시 한 판 둘 채비를 하였다. 차마 졌다는 말도, 다시 한판 두자는 말도 안나오셨나 보다. 그저 빠르게 본인의 기물을 원위치 시켜 놓고는 날 바라보았다. 다시 한판 두자는 말이었다.
‘죄송하지만 제 상대가 아닌것 같습니다.’
라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무표정으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자신만만한 할아버지 표정 뒤에 패배의 두려움을 보았듯이, 그 분 또한 최대한 아무런척 안하는 모습 뒤로 의기양양하는 내 모습을 보았을 것이었다.
장기판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심판 겸 관객 역할을 하셨던 어르신이
‘역시 젊은 사람한테는 안되는 구만.’
말이 들려왔다. 얼핏 우리들의 늙음을 한탄하는 듯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그분의 표정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출처 https://pgr21.com/freedom/97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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